GM Boris Spassky
전기
보리스 스파스키는 1969년 제10대 세계 챔피언에 오른 체스 선수입니다. 그는 균형잡히고 모든 포지션에서도 안정감을 가진 선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72년 미국의 바비 피셔(Bobby Fischer)와 세계 챔피언전을 치른 것으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패배한 것만으로 스파스키를 기억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10대 경력
스파스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체스에 두각을 보였습니다. 1955년에 그는 이미 세계적인 체스 선수였고 세계 유소년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1955년 인터조날(Interzonal) 대회에서 7승 8무 5패를 기록하며 1957년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합니다. 10명으로 구성된 더블 라운드 로빈에서 그는 3승 13무 2패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칩니다. 대회의 승자는 6승 11무 1패를 기록한 바실리 스미슬로프(Vassily Smyslov)였는데, 그의 유일한 1패 상대는 스파스키였습니다.
성장
아쉽게도 스파스키는 1966년 전까지 도전자 결정전에 다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업적은 킹스 갬빗으로 2 경기를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1960년 소련 챔피언십에서 다비드 브론스타인을 상대로 멋진 희생 전술을 선보였습니다. 이 경기는 제임스 본드의 영화 Russia With Love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2개월 후 스파스키는 아르헨티나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젊은 미국 선수를 만납니다. 그의 이름은 바비 피셔였습니다. 이 경기 이후에 피셔는 3...d6를 개발하며 킹스 갬빗은 더 이상 위력적인 오프닝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1년 후 스파스키는 피셔를 압도하며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마르 델 플라타에서 스파스키와 피셔는 각각 12승 3무(13.5점)와 13승 1무 1패(13.5점)를 기록하며 공동 1위에 오릅니다.
도전자 결정전
1964년 스파스키는 인터조날 대회에 출전합니다. 그는 13승 8무 2패를 기록하며 17/23점의 승점으로 1965년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합니다. 도전자 결정전에서 그는 폴 케레스(Paul Keres)를 6대 4로, 에핌 겔러(Efim Geller)를 5.5대 2.5로 꺾고 결승에 올라 전 세계 챔피언 미하일 탈(Mikhail Tal)을 상대합니다.
미하일 탈이 2경기를 승리하며 앞서갔지만, 스파스키는 이내 3경기를 잡아내며 동률을 만들었습니다. 5번의 무승부가 있고 스파스키가 마지막 3연승을 거두며 세계 챔피언 티그란 페트로시안(Tigran Petrosian)에 도전할 자격을 얻습니다. 흥미롭게도 승부가 갈린 5번의 경기 중 흑이 4번을 승리했습니다.
10경기까지 스파스키는 페트로시안에 2패를 당하며 밀렸지만 13경기와 19경기를 잡아내며 5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대결을 동률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직후 경기와 22경기에서 페트로시안이 승리하며 타이틀 방어에 성공합니다.
스파스키는 1968년 또 한 번 도전자 결정전에 출전합니다. 그는 겔러를 8강에서, 덴마크의 벤트 랄슨을 4강에서 잡고 결승에 진출합니다. 결승 상대는 4강에서 미하일 탈을 물리친 빅토르 코르치노이였습니다.
스파스키는 2경기와 4경기에서 승리하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코르치노이는 6경기를 승리하며 반격을 시작했지만, 이어지는 2 경기에서 스피스키가 승리하며 그 의지를 꺾었습니다. 스피스키는 남은 2경기를 비기며 페트로시안에 다시 한번 도전할 기회를 잡습니다.
세계 챔피언
스파스키는 비록 1경기에서 패했지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4경기 승리로 동률을 만들고 5경기 승리로 리드를 잡고, 8경기에서 그 격차를 벌렸습니다. 하지만 페트로시안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11경기가 끝난 후 두 선수의 대결은 균형을 맞췄습니다.
치고받는 11번의 경기 이후에는 5번의 무승부가 이어졌습니다. 스파스키는 17경기에서 승리하며 다시 리드를 잡았고 19경기에서 페트로시안을 24수만에 무너뜨리며 리드를 2점 차로 벌렸습니다.
페트로시안은 20경기를 승리하며 격차를 좁히며 대결은 한 치 앞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스파스키가 바로 다음 경기인 21경기에서 승리하며 2점 차 리드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스파스키는 남은 3경기에서 2경기만 무승부로 만들면 세계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고, 그것을 해냈습니다. 22경기와 23경기가 모두 무승부로 끝나며 스파스키는 제10대 세계 챔피언에 오릅니다.
스파스키의 체스 경력 중 가장 유명한 경기는 세계 챔피언이던 1970년 경기일 것입니다. 그는 덴마크의 랄슨을 상대로 17수에 룩을 희생하는 멋진 플레이로 승리를 따냈습니다.
스파스키는 피셔의 최고 전성기 시절이었던 1972년 월드 챔피언십에서 그를 상대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스파스키는 3승(피셔의 몰수패 1경기 포함)을 거뒀지만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피셔는 21경기만에 승리를 확정 짓고 제11대 세계 챔피언에 오릅니다.
세계 챔피언 이후
1975년 도전자 결정전에서 스파스키는 또 다른 젊은 선수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로버트 바이른(Robert Byrne)을 8강에서 꺾은 그는 4강에서 아나톨리 카르포프를 만납니다. 스파스키가 1경기를 승리했지만 카르포프는 3경기와 6경기를 따내며 리드를 잡았습니다. 카르포프는 11경기마저 승리하며 스파스키의 4연속 월드 챔피언십 진출을 막았습니다.
스파스키는 1978년 도전자 결정전 결승에 오르지만 이번에는 코르치노이가 그를 막았습니다. 그는 그다음 도전자 결정전에서 그는 8강에서 탈락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세계 챔피언 도전이었습니다.
스파스키의 마지막 주요 체스 대회는 1992년에 열린 바비 피셔와의 재대결이었습니다. 이 대결은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비 피셔는 20년 동안 체스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고 스파스키 또한 전성기가 한참 지났기 때문에 두 선수의 대결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스파스키는 5경기를 승리했지만 30경기에서 피셔가 먼저 10승 고지에 오르며 대결에서 승리합니다.
스파스키는 2002년까지 정기적으로 체스를 계속했으며 2009년에는 코르치노이와 대결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197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고 2012년에는 러시아로 돌아와 현재는 러시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유산
바비 피셔와의 1972년 대결로 스파스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스 선수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그렇습니다.
체스 내적으로 보았을 때 스파스키는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잘 잡혀있고 어떤 스타일의 경기도 할 수 있는 선수였습니다. 위 경기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는 훌륭한 경기력을 보였습니다.
스파스키는 1972년 월드 챔피언십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체스보드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능력입니다.